주의1: 이 포스팅에는 현재 상영 중인 영화 "마이 웨이"의 내용이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스포일러를 피하시고 싶으시면 읽지 않으시는게 좋습니다.
주의2: 그러나 스포일러를 피하기 위해 뒤로 가기를 누르는 바람에 영화를 보게 된다면, 영혼에 깊은 상처를 받게 될지도 모릅니다. 경고하건대, 이 영화는 아주 지루하며, 러닝 타임은 너무 길고, 상당히 잔인한 장면을 포함하며, 클리셰를 덕지 덕지 칠해놓은 영화입니다. 막연하게 관객들이 울어주거나 최소한 눈요기라도 하면 티켓값에 대한 본전 생각이나 날린 시간에 대한 기회 비용을 떠올리지 않겠지라는 어설픈 기대심으로 제작한듯한 '그런 수준의 영화'입니다. 개인적 취향과 감상을 강요할 생각은 없지만, 제 지인이 이 영화를 보러 간다면 저는 간곡히 말리겠습니다.
이 영화의 모티브가 된 유명한 사진 한 장을 먼저 소개합니다. 흔히 "Korean in Normandy"라는 제목으로 불리는 (경우에 따라서는 "Japanese in Normandy"라고도 통용되는) 이 사진은 옆의 설명이 붙은 것도 있고, 사진만 인터넷을 떠도는 케이스도 있습니다. 보시다시피 연합군 병사의 조사를 받고 있는 독일 군복을 입은 동양계 병사가 서 있습니다. 이 병사는 누굴까요? 스티븐 앰브로스조차 이 사진에 대해 언급을 했으며, 많은 2차대전사 애호가들이 추적해보았지만 확정된 사실은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심지어 1944년 유타 해안에서 잡혔다는 기록조차 믿기가 애매합니다)
막연히 "아마 시베리아 동쪽 출신으로 유럽 전선에 끌려왔던 누군가가 저기까지 흘러갔던 것이 아닐까"라는 추측이 가능하고, 개중에는 과감하게 합성의혹을 제기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정말 노르망디에서 독일군 포로로 동양인이 체포되었다면 그게 묻힐만한 이야기냐는 것이죠) "마이 웨이"는 이 사진 한 장에서 영감을 받아 시작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영화의 첫 장면은 1948년 런던 올림픽을 달리는 한 마라톤 주자를 보여주면서 시작합니다. 뒷모습만 보여주는 동양계 청년의 이름은 김준식, 런닝의 뒤에 KIM J S이라고 선명하게 새겨져 있어 그 이름을 시각적으로 각인시켜줍니다. 그리고 화면은 빠르게 20년 전 1928년의 경성으로 전환 됩니다. 이런 식의 내러티브는 강제규 감독이 상당히 즐겨 쓰는 것이고, 전작 "태극기 휘날리며"에서도 써먹은 작법 입니다. 이 외에도 "마이 웨이"에는 전작에서 사용된 기법이나 장면이 많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좋게 말하면 자신있는 수법을 용감무쌍하게 휘둘렀다는 것이지만, 나쁘게 보자면 익숙해질대로 뻔한 내러티브를 - 클리셰를 과용하고 있는 안이한 연출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영화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전반부는 경성에서 소년 김준식과 하세가와 타츠오가 만나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김준식은 일본인 장군 (헌병? 초반이라 집중을 못했더니 병과 칼라장 색깔이 기억나지 않는군요. 하지만 경성에 장군급이 관사에서 아들 가족 불러서 살 수 있으려면 병과는 뻔하지 않을까요) 관사에서 하인 노릇하는 조선인의 아들입니다. 타츠오는 도쿄에서 이사 온 주인의 손자입니다. 11살 동갑의 나이로 만난 두 사람은 초면부터 묘한 라이벌 의식을 가진다는 설정입니다. 지저분한 헌 옷을 입고 고무신 끄는 하인의 아들이 세련되게 차려 입은 동갑내기 주인집 손자에게 묘한 질시를 가지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두 소년 사이에 라이벌 의식의 씨앗을 보여주기 위해 감독이 선택한 연출은 신분이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나는 갓 만난 11세 두 소년이 달리기를 하는 장면입니다. 두 소년이 격의 없이 어울릴 신분일까요. 벌써부터 유치함이 줄줄 흐리기 시작합니다.
두 사람은 계층적, 민족적 갈등을 키워나가며 성장해 갑니다. 경성부의 온갖 학생 체육 대회에서 자기 민족의 대표처럼 경쟁하니 당연한 일입니다. 이 관계는 어느날 관사의 연회에서 장군 앞에 배달 온 소포 폭탄이 터져 장군이 사망함으로써 파국을 맞습니다. (친절하게도 폭탄은 태극기에 싸여 있습니다) 준식의 아버지는 뜬금없이 헌병대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하고 준식 일가는 쫓겨나게 되는 것이죠. 타츠오가 준식에게 군도를 들이대는 장면은 클리셰와 후까시가 어우러져 뭐라 말하기 힘든 오글거림을 안겨줍니다. 타츠오의 아버지는 (제가 평소에 좋아하던 배우입니다) 의사로 다이쇼 자유주의 냄새를 풍기는 양심적인 인물인데, 아들인 타츠오는 황국 사상에 골수에 들어간 조선인을 혐오하는 군인 지망인 것도 어디서 많이 보던 설정이라는 기분이 듭니다.
그렇게 해서 쫓겨난 김준식이 베를린의 영웅 손기정의 도움으로 일본놈들의 방해를 뚫고 올림픽 선수 선발대회에 참가해서 1위를 하지만 일본놈들이 끝끝내 김준식을 떨어트리고 만다는 전개는 거의 60년대 흑백영화에나 나오는 플롯입니다. 왜 도쿄 올림픽 선수 선발전을 경성에서 하는지도 이해가 안되지만, 미리 음모를 짜놓고 2위 하던 선수가 김준식의 진로를 방해하는데 김준식이 그걸 뛰어넘는다는 식의 연출은 달려라 하니에서나 써먹던 쌍팔년도 냄새가 물씬 풍깁니다. 이에 따라 당연히 관중 폭동이 일어나고 폭동 주모자들은 전원 입대하게 됩니다.
총동원령도 안내려졌던 저 시기에 재판으로 충군형(?)을 내리는 것도 이상하고, 자원 입대를 선택했으니 훈방한다는 취지도 아닌거 같고. 무엇보다 1938년 육군특별지원제에 따라 일본군에 지원 입대한 조선인은 이때까지만 해도 전원 "자발적 지원자"입니다. 한 2000여명 지원해서 400명 정도 붙었을 겁니다. 그 정도로 일본인들도 '황군'에 조선인이 들어오는걸 원치 않았고, 출세길이 시원찮은 조선 청년들에겐 일본군도 괜찮은 직장으로 보였는지 모를 일입니다. (군국주의 사회였으니까요. 일본군 입대에 대한 저항은 강제 징집, 징용이 시작된 태평양 전쟁기에 본격화됩니다.)
그리하여 억지로 끌려간 북만주 내지는 외몽골의 보병 부대에서 김준식과 조선인 지원병들은 구 일본군식 기합과 차별에 시달리게 됩니다. (근데 군복은 이 시점에서 바꿔 입어야 하는데 여전히 칼라장 달고 있습니다.) 이 와중에 영외 작업 중이던 김준식 등에게 쉬라이라는 중국인 빨치산 저격수가 나타나서 총질을 하고 이를 김준식이 생포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그 과정에 일본인 병사들'만' 희생되어 오해를 받고 일본인 장교들에게 닦달을 당한다던가 하는 장면은 거의 60년대 만주 독립군 영화를 보는듯한 추억의 맛이 각별 합니다. 일단 총을 잘 쏘거나 무술 실력이 있는 신비스러운 중국인 미녀(판빙빙)가 나오는데 가족들의 복수를 위해 총을 잡았다는 설정이 뭔가 별스러운 촌티가 흐릅니다. 일본군이 가족을 다 죽이고, 여성은 다 강간했다는데 정작 자기를 생포한 김준식이나 조선인 병사들에겐 적대감도 별로 없습니다. 이런 여성 게릴라를 일본군과 달리 조선인 병사들은 손 끝 하나 건들이지 않고 오히려 동정심을 가지고 대한다는 전개는 뭐 놀랍지도 않습니다.
게릴라가 총 들고 저격해서 병사들을 죽였는데 처형 하지도 않고, 악명 높은 관동군이 노리개로 돌리지도 않고 감옥에 가둬두다가 "우연히" 탈출하게 되는 것은 관객 배려라고 해야 겠지요. 사람이 탱크에 깔려서 하반신이 으깨지는 수준의 잔인한 영화가 성적으로는 얼마나 건전한지 놀랍지도 않습니다. 전쟁이 잔인하게 사람을 죽이는건 괜찮지만, 전시에 사람이 짐승 수준의 윤리관을 표명하는건 눈 뜨고 볼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인가 봅니다. 이런건 90년대 초반에 "여명의 눈동자"로 극복한 줄 알았는데.
이 보병 부대는 한창 노몬한 전투에 휘말린 상황인데 한 번 전투에서 퇴각한 후, 신임 대대장(어쩌면 연대장일지도 모르겠습니다)이 착임합니다. 새로 온 부대장은 바로 하세가와 타츠오 대좌(대령)입니다. 김준식과 동갑으로 고등학생이었던 친구가 대뜸 부임을 했는데 계급이 대좌(대령)입니다. 분명히 첫 장면에서 이 두 명이 만났을 때가 1928년 11세입니다. 1939년 정도로 보이는데 21세에 대좌, 어지간하면 고증 따위는 신경 안쓰겠다는 마음가짐이었지만 이쯤 되면 기가 차서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소대장 정도로 나와도 이해를 할까 말까 하겠는데, 하세가와 타츠오는 아마 다이쇼 천황의 숨겨둔 아들쯤 되었나봅니다. 새로 부임한 똘끼 충만한 대좌가 후퇴를 명령했다는 이유로 전임 부대장을 이등병으로 강등시키고 할복을 명령하고, 전 부대원 앞에서 할복을 하는 것은 틀에 박힌 구 일본군 묘사인데, 이런 장면을 오랜만에 봤더니 신선함마저 느껴집니다.
그리고 나서 자살특공으로 소련 전차부대를 격파하겠다는 선언을 하며, 타츠오는 조선인들을 골라서 자살부대로 편성합니다. 광기어린 일본군 장교야 역사 반영이라고 하겠지만, 조선인을 총알 받이로 쓴다는 것은 전형적인 묘사입니다. 이에 반발한 김준식이 일등병 주제에 감히 대좌와 입씨름을 하다가 감옥에 갇히는데, 퇴각 한 번 했다고 부대장을 이등병으로 강등하고 할복시키는 그 엄정한 일본군이 또 이런건 즉결까지는 하지 않습니다. 내일 죽이겠다며 감옥에 던져넣는데, 그 감옥이 하필 쉬라이가 갇힌 감옥이라는 것은 우연의 일치겠죠. 마침 그날 밤 자살 특공에 편성된 조선인 몇 명이 탈출을 결심하는 운수 좋은 일이 벌어집니다. 이왕 탈출하는 김에 김준식도 구출하자는 것은 우정의 발로니까 개연성이 있는 거겠죠? 그 탈출에 쉬라이가 묻어가는 것도 행운일 겁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도주 중에 기습하러 나온 소련군 전차 부대를 발견한 김준식이 기습 받을 일본군 부대에 경고해주러 혼자 뛰어 돌아가는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휴머니즘의 발로입니다. 만에 하나 부대에 잔존한 조선인 지원병을 생각한 소치라고 한다면, 그 김준식을 쫓아온 쉬라이는 무슨 의리의 발로일까요? 그 혼자 뛰어가는 김준식을 마침 지나가던 소련 비행기가 쫓아다니며 기관총을 난사하는 것은 운이 없는 일이고, 김준식을 쫓아온 쉬라이가 마침 총을 들고 있어서 (운수 좋게 묻어왔다가 다시 김준식을 쫓아서 일본군 부대로 따라가는 정신 나간 중국 계집애에게 총 한 자루를 인심 좋게 건네주는 탈영병들?) 럭키샷 한 발로 전투기를 격추하는 것은 운이 좋은 일이고, 하지만 마지막에 비행기에서 쏜 총알에 맞아서 쉬라이가 죽는 것은 결국 운이 없는 일이겠지요. 운이 좋든 나쁘든 모두 심히 생각하기 어려운 희한한 우연이 중첩됩니다. 이런 식으로 내러티브를 끌고 가면서 돈을 벌 수 있다니 누군지 몰라도 참 운이 좋습니다. 이런 희귀한 우연의 중첩을 기념하기 위해 장중한 음악을 꼭꼭 삽입하는게 강제규의 작법입니다.
영화 마켓팅에서는 거의 3명의 주연급으로 마구 선전하던 판빙빙은 여기서 끝이 납니다. 뒤에도 더 나오지 않고, 언급도 안됩니다. 솔직히 이 영화 흐름상 쉬라이는 있으나 마나한 배역입니다. 없어도 내러티브 진행에 하등 문제가 없습니다. 대체 왜 나오는걸까요? 중국에 수출하기 위해서? 결국 그녀가 이 영화에 기여한 정도는 초반에 안내역으로 까메오 출연을 한 KARA의 니콜과 다를게 없습니다. 니콜은 왜 나왔을까요? 단역 부문에 당당히 Kpop 아이돌 이름을 올리기 위해? 문제는 이 영화의 길이가 155분이라는 겁니다. (물론 영화사는 137분이라고 강변하지만 관객은 6시 35분에 상영관에 갇혀서 8시 10분까지 앉아 있어야만 합니다)
그리하여 결국 전쟁이든 뭐든 다 회의적인, 그저 달리기 선수가 되고 싶은 김준식과 황군 사상에 골수에 파고들어 독전을 한다며 마구 일본군마저 쏴대던 타츠오는 소련군의 포로가 되고 맙니다. (노몬한 전쟁에서 포로가 되어 시베리아로 끌려가다니 자살을 추천한다) 뻔한 클리셰에 시달리며 여기까지 오는 동안 시계를 몇 번이나 흘끔거린 상황에서, 시놉시스를 반추해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직 절반도 안 지난거 같습니다. 아니나다를까, 스토리텔링 상으로 이것은 고작 1/3 지점입니다. 이 영화는 드라마화가 어울렸거나 채널 CGV용으로 팔렸어야 하는 영화입니다. 아니면 이쯤에서 고전적으로 인터미션을 줘야 하는게 아닐까요. 디스크 환자인 저는 죽고 싶은 심정입니다.
중반부는 김준식과 타츠오가 시베리아로 끌려가서 고초를 겪는 부분입니다. 그래도 전반부 내러티브가 완전 클리셰로 꽉 채워졌던 것과 달리 이 부분부터는 그나마 조금 덜 식상한 부분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포로수용소에서 완장질 하는 친구, 그 친구와 갈등하는 주인공 같은 것은 빠질 수 없는 요소이고, 강제규답게 주인공 두 명이 모두가 열광하는 즉설 링에서 치고 박고 싸우며 생사결을 하는 장면은 빠지지 않습니다. "태극기 휘날리며"에도 나왔던 것을 고대로 써먹습니다. 감독은 "이렇게 우정은 생겨나고..."라고 전달하려는거 같은데, 남자들은 싸우면서 친해진다는 속설은 남중, 남고를 겪으며 선생님들의 훈화로 진절머리게 들은 것입니다. 내 돈 내가면서 영상으로까지 전달받고 싶지는 않습니다. 생사결 중 타츠오를 죽일 결정적인 기회를 잡지만 (타츠오가 죽인 김준식의 친구들, 타츠오 덕분에 불구가 된 아버지, 타츠오 대좌가 불태워버린 운동화 등을 생각해봅시다) 김준식은 그를 용서합니다. 이런 휴머니즘에 개연성은 없고, 아마 장동건 같은 미남이 칼로 사람을 찍으면 사람들이 너무 놀랄까봐 배려하는거 같습니다.
타츠오는 소비에트식 전체주의를 겪으며 서서히 인성이 변해갑니다. 특히 수용소장에 의해 양심추지를 강요받으면서 "너희가 나에게 전향을 강요할 권리가 없다"고 항변하다가, 자신이 조선인 지원병들을 상대로 황군 사상을 주입했던 과거를 떠올린다든가, 후에 소련군으로 끌려나가 우라 돌격을 강요받으면서 뒤에서 독전한답시고 총을 쏴대던 정치 장교를 보며 만주에서 자신이 저지른 일을 떠올린다든가 하는 것은 나름 이해가 되는 부분입니다. 워낙 개연성이 부족한 이 영화에서 그나마 쓸만한 심리묘사라고 한다면 이 정도입니다. 타츠오 말고 종대도 괜찮은 인물 묘사를 보여주는데, 막판 죽음이 신파의 신파를 거듭해서 '정말 종대가 안똔이 된거였는지, 아니면 표변만 하고 있었던 것인지' 감을 잡을 수 없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한 순진한 청년이 완전히 공산주의에 물들어서 교조적인 이념광이 되었다가 체제에 속다시피하여 우라 돌격을 하다가 죽는다는 식이었다면 전쟁의 비극성이나 이념의 허무함도 엿보이며 멋진 인물 묘사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사진 들고 바들바들은 그다지 허무하지도 비극적이지도 않고 그저 신파스럽습니다. MG 42 십 수 발을 맞고도 김준식을 끌어안았다가 울다가 말도 좀 하고, 사진 꺼내서 (김준식 여동생 사진입니다) 보고 싶다고 징징댈 수 있는 초인적인 능력은 둘째치더라도요.
입체적인 인물로 변해가는 타츠오는 그렇다치더라도 김준식은 인물 묘사의 깊이는 매우 부족합니다. 그는 중뿔날 정도로 헌신적입니다. 이미 수용소에서 타츠오를 죽이지 않은 김준식은, 전선에 끌려나와서도 타츠오를 구하고 귀머거리가 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기적적으로 전선에서 살아나서 독일 진영으로 항복하러 갈 때 타츠오를 챙기고, 타츠오가 복부 관통상으로 부상당하자 업고 갑니다. 이 무슨 휴머니즘의 화신 입니까. 이런 헌신성의 화신은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장동건이 맡았던 역과 비슷합니다. 문제는 그때 장동건은 "동생 구출"이라는 뚜렷한 이유가 있었다는 것이지요.
나중에 타츠오는 노르망디에서 김준식에게 왜 이렇게 잘 해줬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사실은 11살 때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나는 우정을 느꼈지. 우리는 달리기를 했고, 그 동안 사실 우리는 서로 우정을 느꼈던거야'라는 식의 고백 비스무레한게 흘러 나옵니다. 이쯤 되면 눈을 감고 구역질을 억누르기 위해 노력해야 할 정도입니다. 이렇게 얘기하는 성인군자는 주인집에서 누명을 쓰고 쫓겨나 인력거꾼을 하면서도, 폭동의 주모자라고 낙인 찍혀 억지로 복무하게 된 외몽골의 일본군 부대에서도, 시베리아의 굴라그에서도, 독일의 대서양 방벽에서도 저녁마다 달리기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김준식의 '달리기 연습'은 인물상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특색으로 제시되는 것이지만, 이런 묘사는 도무지 상식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포로가 동상 걸리면 끌고 가서 죽이고 시체는 땔감으로 쓰는 굴라그에서 저녁 마다 달리기 연습이라는게 납득이 가능 설정입니까? 귀머거리 소련군 포로(게다가 아시아인)를 자원 입대 시켜주는 독일 동방부대만큼이나 관대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대망의 D-Day. 박살이 난 해안 진지에서 도망가던 두 사람 중 한 명은 총을 맞고 마는데... 6시 35분에 보기 시작한 영화가 8시에 이르러서 대망의 마지막 씬이 나옵니다. 마지막 씬과 그 마지막 씬을 통해서 첫번째 장면으로 넘어가는 기법은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잘된 부분입니다. (이런 기법은 사실 "태극기 휘날리며"의 그것과 크게 다르진 않습니다. 그만큼 감독은 참으로 태만한 연출을 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동시에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만 잘 찍고" 나머지는 신파와 볼거리 (잔인한걸 보여주든가 물량을 때려박던가)로 떡칠을 하면 관객들은 만족할거라는 얄팍한 강제규식 계산이 돋보이는 부분입니다. 물론 그 15분 정도의 성의와 제작비 하나로 퉁치기에는 140여분가량 보여준 내러티브는 그냥 똥덩어리 그 자체 입니다.
이 영화가 자랑하는 "물량" 부분을 주목해볼까요. 제작비의 많은 부분을 때려넣었을거라 추정되는 노르망디 씬은 그럭저럭 "라이언 일병 구하기" 느낌이 납니다. 그러나 10년 전 영화와 비교 당하기 위해서 지금 와서 CG를 때려넣는 것은 어떤 실익이 있는 것일까요? "태극기 휘날리며"는 그럭저럭 내러티브 상에 참신한 부분도 있었고, 장동건의 심리 변화가 개연성 있게 제시되었고, 무엇보다 한국전쟁의 경우에는 이 정도 수준의 전쟁 영화로 한번쯤 다뤄보았어야, 특히 한국인의 손에서 묘사되어 볼 가치가 있었다는 당위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은 이미 클래식의 반열에 오른 영화들이 무수히 많습니다. 그리고 그 찬란한 성과물들에 비교해 볼 때, 굳이 이 정도라면 새로 어카이브에 추가될 가치가 있는지 매우 의심스럽습니다.
중국에 팔릴 것인가? 안될건 없다고 봅니다만, 유감스럽게도 "집결호" 쪽이 더 재미있었습니다. 한국인이라면 편안한 기분으로 볼 수 없는 중국 공산당 자위용 전쟁영화 "집결호"지만 "마이 웨이"에 비교하면 감성이라도 자극이 됩니다. 일본에는 팔릴 것인가? 팔리긴 하겠지만 인기 있을거 같지는 않습니다. 한국인이든 일본인이든 보면서 심경 편하게 보기는 어려운 장면들이 많았으니까요. (극단적으로는 국민 배우 장동건이 일본어 쓰니까 못봐주겠다는 분도 계시는거 같습니다만) 그런데 한없이 유치함에 가까운 주제 의식 (우정)과 오그라드는 신파가 일본인들을 사로잡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센티멘털한 관객들에게 이 정도의 잔인함을 스펙타클이라고 (설마 염전사상을 고취하기 위한 고도의 연출?) 보여주는 미묘한 연출로 어필할 수 있을까요? 어쨌든 투자비를 회수하려면 반드시 팔려야 할 영화입니다. 근데 투자비를 회수하지 못하는게 한국 영화의 미래를 위해서는 좋을거 같기도 합니다. 이 정도 자원을 가지고 이렇게 영화를 찍는 강제규 감독은 굳이 전쟁영화를 할 필요는 없을 거 같으니까요. 계속 "은행나무 침대" 같은 쪽을 했으면 얼마나 다행스러웠을까요.
이 포스팅을 쓰다가 유투브에서 10여년 전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상륙씬을 찾아보았습니다. 그 침묵의 영상에서 보게 되는 임팩트는 여전히 유효했습니다. 강제규 감독이 하다못해 배경음악의 용법이라도 좀 개선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긴 발전이 없어도 이런 투자를 받아서 이 정도 영화를 찍고, 그리고 천만 관객을 꿈꿀 수 있는 감독이니 - 결론은 강제규는 참 운이 좋은 감독이구나 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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